코로나19 이전, 아시아의 전염병


“대성당들의 시대가 찾아 왔어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
 
뮤지컬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 〈대성당들의 시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극의 배경 무렵, 유럽의 부유한 도시에서는 경쟁하듯 대성당을 지어 올렸어요. 중세 유럽을 뒤흔들었던 페스트의 공포 따위는 잊은 양, 제각기 건축 기술과 도시의 재력을 과시했습니다. 성당의 드높은 첨탑과 아름다운 장미창 앞에서 잠깐이나마 새 시대를 찬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역병, 판데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구미 중심부 국가만 겪는 일도 아니에요. 당장 올해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어요. 미국에서 발발한 스페인독감이 조선반도까지 닿았던 근대를 생각해 보세요. SARS, 신종플루, 메르스, 에볼라는 또 어떤가요.
지금부터 제가 소개할 책들은 전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출판됐습니다. 가급적 제게 친숙한 문화적 배경으로 선별했고요. 함께 읽어보시겠어요?


『질병의 사회사:동아시아 의학의 재발견』

신규환 지음 | 살림출판사 | 2006년 | 94쪽

전염병 관련 서적을 살피는 내내 한국어로 출간된 아시아 전염병 관련 대중서적이 드물어서 힘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의학사, 특히 전염병 연구에 관련된 교양서적은 구미 중심부 국가의 시선으로 쓰였더라고요.
이 책은 동아시아인의 시각에서 근대 동아시아를 떠돌았던 전염병이라는 유령을 추적합니다. 동아시아 내부의 질서가 있다는 ‘동아시아론’에 입각해 쓰인 책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전염병이 국경을 넘나드는 루트는 ‘중개무역’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는 제국을 중심으로 삼은 ‘조공무역’도 병을 옮기는 매개였지요. 저자는 질병사 연구가 동아시아 일상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다고 주장합니다. ‘호흡기질환과 흡연의 사회사’라고 하면 시큰둥할 수도 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표현은 왜 아직까지 쓰일까’ 고민하는 까닭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94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인데도 개론서로는 내용이 알찹니다. 식민지 방역은 낙후됐으나 제국주의자들은 선진 문명을 지녔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박도 빼놓지 않습니다.
 

#짧음 #개론서 #동양사 #전염병 #전자책있음


『위험한 요리사 메리:마녀라 불린 요리사 ‘장티푸스 메리’ 이야기』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 곽명단 옮김 | 돌베개 | 2018년 | 224쪽

서구중심적 시야에서 벗어나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웬 미국 배경 이야기냐 싶겠지만, 메리 맬런이라는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의 사연은 한국의 근현대사로 번안할 만합니다.
예컨대 이런 얘기입니다. 재일조선인 찬모 김순덕은 젊어서부터 요리 솜씨가 좋기로 이름나, 동경의 부유한 집안에 고용되어 찬모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김순덕이 일한 집마다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합니다. 보건국은 이를 추적하던 끝에 김순덕이 자기도 모르게 전염병을 퍼뜨리는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걸 알게 됩니다. 여성이고 가난한 노동계급 이민자이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민족이었던 김순덕은 “손으로 꼽을 만한 기형적 변종” 같은 평을 공공연하게 듣습니다. “살아 있는 구경거리”가 된 채로 전시되다가, 평생 격리 병동에 유폐되어 살아가게 되지요.
가상의 요리사 김순덕이 받은 처우가 공정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현대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성차별, 계급 차별, 인종 차별 등 여러 차별이 중첩되어 혐오가 개인에게 집중된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전염병 #감염자 #소수자 #혐오 #메리맬런


『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지음|시대의창|2018년|408쪽

현직 의사가 써낸 의학사, 개중에서도 판데믹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는 마치 창세기부터 시작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꾼 같습니다. 생명의 기원부터 인류가 문명을 일구기 이전에는 어떤 질병을 겪었는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여러 문명이 어떤 전염병을 앓았는지에 대해 구성지게 풀어냅니다. 고대 로마와 삼국지를 오가는 전염병 이야기를 풍요로운 필치로 담아내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전에 읽었다가는 밤을 꼬박 샐 정도로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합니다. 신화, 전설, 책, 영화 등이 레퍼런스로 제시되고요.
아시아를 거친 전염병의 역사는 중간에도 드문드문 등장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목차는 온전히 그에 바쳐졌습니다. 인도아대륙,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병, 한국의 질병관 등에 대한 현직 의사의 시선을 접할 수 있는 건 쉬운 기회가 아닙니다.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아쉽지만, 재미있다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전염병 #역사 #대중서 #박학다식 #탈서구


『스탠드』

스티븐 킹 지음|조재형 옮김|황금가지|2007년|1~5권은 357쪽 내외, 최종권 6권은 466쪽!

구미 중심부 얘기는 많이들 했으니 저까지는 안 할 생각이었는데, 이 얘기는 도무지 빼놓을 수 없더라고요. 호러와 스릴러의 거장이 1978년도에 처음 발표한 바이오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흑사병과 코로나19를 합친 것 같은 호흡기질환이 등장해요.
2020년, 미국에서는 코로나19 사태에 관해 ‘『스탠드』 세계에 사는 것 같다’는 말이 퍼졌다고 합니다. 아무도 마스크를 안 쓰고요, 미국 대통령이 그냥 독감이라고 얘기하다가 전염병에 걸립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같죠? 작가인 스티븐 킹은 독자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라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전염병이 전파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1권을 읽다 보면 미안해할만도 합니다.
여섯 권에 달하는 이 장편 소설은 1978년에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짧았어요. 한국에 출간된 황금가지 판본은 소위 ‘감독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염병 #스릴러 #미국소설 #스티븐킹 #아포칼립스


『전염병의 문화사:고려시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권복규, 김영미, 이현숙, 김순자, 이정숙 지음|혜안|2010년|344쪽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 발발 이후, 국가마다 제각기 다르게 대처하고, 다른 결과를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별로 의료 체계가 다른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 천 년 전이라면 어땠을까요. 불교와 호족의 나라, 고려였다면요.
이 책에서는 고려 정부가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애썼는지 아주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그 시기 전염병이 미친 정치·사회적 영향을 분석하기도 했고요. 당시 사람들이 전염병에 대해 얼마나 알았는지, 어떤 전염병이 돌았는지, 이에 대해 국가와 민간에서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관료제가 발달한 동아시아의 특성이 깊게 관련되어 있기도 하구나 싶었고요. 게다가 당시 불교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까지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종교와 전염병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전염병 #동양사 #고려사 #역사 #미시사 #살짝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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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녹주

2019년부터 단편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어머니이 도원향』,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와 장편 『아름다운 비나이다와 그녀의 짐승들』을 발표했다. 한자문화권 전반의 역사·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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